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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자는 민주당의 불모지인 충청도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사진: 안희정 당선자 홈페이지) |
노무현 대통령은 생전 안희정 충남지사 당선자의 가장 큰 장점으로 사람관계를 들었다.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갈등을 다독거리고 추슬러 사람들을 이끄는 점을 높이 샀다.
이런 점 때문인지 안 당선자는 야권 내 친노 인사 중 ‘DJ 지지 그룹’의 거부감이 가장 적은 정치인이다. 안 당선자는 스스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을 꼽고 있으며, 그의 인생 항로에 미친 두 대통령의 영향은 거의 결정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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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전 대통려의 왼팔이라고 불릴 정도로 안희정 당선자와 노 전 대통령은 각별한 사이였다. (사진:안희정 당선자 홈페이지) |
안 당선자는 1964년 10월 28일 충남 논산군 연무읍 마산리에서 2남 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안 후보의 유년기 추억이란 여느 ‘촌놈’처럼 특별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잠시 다닐 때까지 늘 반장을 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때는 학생회장도 맡았다.
이후 그는 대전으로 유학해 소위 뺑뺑이 2기로 남대전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그는 5?18 광주민주화항쟁과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계엄사에 끌려간 뒤 고교 입학 6개월 만에 중퇴했다. 안 당선자는 1982년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1983년 고려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고려대 운동권 출신인 그는 1989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비서실장이던 김덕룡 의원과 일하면서 정계에 진출했다. 1990년 1월 삼당합당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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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1주기 콘서트에 선 안희정 당선자(사진: 안희정 당선자 홈페이지) |
노무현 등 7인이 3당 합당을 거부했고 당직자 중에서도 안 후보를 포함한 18인이 잔류를 택했다. 그리고, 꼬마 민주당이 탄생했다. 이후 `정치인 안희정'을 담금질한 것은 1994년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하면서부터.
안 당선자는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이었다. 후에 노대통령은 그를 “정치적 동지"라고까지 불렀다. 노무현 대통령은 안 당선자에 대해 “안희정씨는 유능한 사람”이라며, “대통령을 만들어 준 사람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실제 참여정부 5년은 그에겐 고난의 세월이었다. 대선 자금 수사로 구속돼 참여정부 내내 아무런 공직을 맡지 못했을 뿐 아니라 18대 총선에서는 이 전력이 문제가 돼 공천 심사대상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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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그는 모든 인생역정을 딛고 승리했다. |
그는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깨끗이 승복했다. 대신 그는 같은 해 7월 최고위원 경선에서 당선돼 당당히 재기했다. 당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당내 평가는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는 경선 내내 노 전 대통령의 가치와 철학을 홍보했다. 그가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극에 달했던 2007년에 참여정부평가포럼을 이끌며 참여정부에 대한 왜곡된 공격에 온몸으로 맞섰다. 그가 이번에 충남도지사에 도전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을 다시 평가받겠다는 것이다.
안 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도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 이후 충남의 새로운 대표가 되겠다, 충남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겠다, 2인자 정치를 청산하고 대한민국을 이끄는 지도자로 커보겠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지역주의를 정면 돌파해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국민통합, 국가균형발전의 꿈을 잇겠다는 포부다.
충남도 최초 도지사를 만들어 낸 안 당선자는 이로써 더 큰 도전을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그의 행보가 주목되는 것은 바로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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