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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과 분노 같은 안티테제로는 미래 없어…
평화라는 힘을 다룰만한 장인 되고 싶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논산 촌놈’이다. 철물점의 아들로 태어나 재선 도지사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올해 쉰셋. 민주화운동 세대가 흔히 그렇듯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야 했고, 거기에 더해 ‘노무현의 남자’로 겪은 정치 역경도 짧지 않았다.
안 지사는 1964년 논산시 연무읍 마산리에서 철물점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자곡초교, 연무중을 거쳐 1980년 남대전고에 입학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과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등에 대한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계엄사에 끌려간 뒤 고교 입학 6개월 만에 중퇴했다가 2003년 명예졸업했다.
고려대 철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에 투신한 그는 졸업 후 1989년 국회의원 비서로 여의도 정치권에 입문했다. 94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공적 인연을 맺었다. ‘바보 노무현’의 자취는 넓고 깊었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철학과 신념에 매료됐고, 이후 ‘좌희정’이란 별칭을 얻으며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다.
1990년대는 개인사나 정치사 모두 격동의 시대였다. 90년 김영삼 총재의 3당 야합을 거부하고 꼬마민주당의 출범에 함께 했던 그는 현실정치에 절망감을 느끼고 대학선배가 시작한 출판사 영업부장으로 취직해 생활인으로 살았다. 그는 최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뤄진 여성신문 김효선 발행인과의 대담에서 YS(김영삼)의 3당합당이 가져온 역사의 해악을 꼬집었다.
“사실 힘들었다. 당시 김 대통령이 독재 대 반독재의 시대가 끝났다며 3당야합을 한 후 전선 자체가 와해됐다. 한 시대의 전선이 끝난 건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민주주의자로 역사의 새로운 전선을 만들지 못하고 그냥 일패도지(一敗塗地)해 낙향하는 군인처럼 긴장을 풀어버린 건 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내가 인생 망쳐도 좋으니까 목숨 걸고 혁명운동 하자고 설득했던 후배들 볼 낯이 없더라. ‘야, 이제 끝났어. 빨리빨리 막차 타고 출세해.’ 90년대가 딱 그 판이었다. 내가 왜 민주주의자로 살았는지 심각하게 고민했고, 민주주의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안 지사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그의 신념은 확고했다. 사회주의 개혁경제가 실패했을 뿐, 휴머니즘이라는 인류역사의 진보 동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휴머니즘이라는 인류역사의 진보적 가치는 전봉준을 만나면 동학이 되고, 맑스를 만나면 공산주의 사상이 된다. 시대마다 꽃피는 이론이 죽는다고 진보주의 사상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 철학을 갖고 새로운 시대의 과제를 봐야 한다. 지방자치를 통해 민주주의의 새 지평을 열고, 더욱 깊이 있게 확산시켜내야 한다.”
그는 2001년 노무현 대통령후보 경선캠프 사무국장을 맡아 참여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이후 대선 자금 관리자로 책임을 지고 1년간 감옥에 갇혔고, 참여정부 5년 동안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2008년 4월 총선 때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출마를 준비해왔으나 구속 전력 때문에 공천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해 7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선출됐고, 2년 뒤 민주당 최초로 충남도지사에 당선됐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 재선됐다.
인간은 누구나 역경을 만난다. 그 역경을 어떻게 뚫고 일어나느냐가 성장을 좌우한다. 안 지사는 자신이 겪은 역경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학생운동 때부터 재선 도지사인 지금까지 30여 년간 미움이 싹틀 때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려고 끊임없이 고민했다. 미움과 분노, 두려움은 한 몸덩어리로 이를 극복해야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다. 미움과 분노 같은 안티테제로는 미래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평화를 이루기 위한 사회원리라면 내가 평화라는 힘을 다룰만한 장인이 돼야 한다.”
그는 “학생운동 동지들끼리 노선을 놓고 악 쓰고 싸울 때부터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며 씁쓸해 했다. 그러면서 87년 대선을 앞두고 비판적 지지(비지), 후보단일화(후단)로 갈라졌을 때 이야기를 들려줬다.


고려대 재학 중 서울지역복학생협의회 활동을 했을 때다. 당시 YS(김영삼)-DJ(김대중) 단일화를 위해 둘을 초청해 고대 운동장에서 합동집회를 열었는데 반대그룹이 집회를 깨겠다고 나섰다고 한다. 첫 번째 징역살이를 마치고 나온 그는 복학생들을 죄다 모아서 인간띠를 만들어 연단 질서를 잡는데 누군가 등뒤에서 이단옆차기로 차는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낯익은 대학 2년 후배였다.
“녀석이 내게 발길질했다는 게 너무 충격이었다. 분노와 미움이 내 마음에 들어와 저기압, 고기압을 만들고 태풍을 만든다. 하지만 그걸 가지곤 인류 역사에서 좋은 민주주의자로 기여하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미움과 상처를 남길뿐 민주주의자로 기여하려면 연대와 우애의 정신, 평화와 사랑의 정신을 남겨야 한다는 결심이 서더라. 이후 내 마음을 정리하는데 모든 시간을 썼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남편 안희정’에 대해 물었다. 그는 “아내(민주원씨)에게 가장 많이 배운다”고 했다. “아내가 나를 데리고 사느라 참 힘들어했어요. 어느 언론 인터뷰에서 남편 어떠냐고 묻자 이러더라. ‘이 사람은요, 설날에 하루종일 설거지하고 돌아온 절 붙들고 갑자기 동학이 어떻고 역사가 어떻고 이야기하는 사람이에요.’(웃음) 난 운동권 출신 부부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가 평생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가부장은 아니었지만 또 다른 형태의 가부장 철학이 내게 있었겠구나 싶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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